하프문베이의 사체
샌프란 하프문베이의 동물 사체에서 시작해, 소로우의 '보편적인 결백'과 죽음·집착 사이를 서성인 월든 독후감
올 2월 샌프란 출장 길에 하프문베이에 들렀다가, 모래밭에 죽어 있는 큰 짐승을 봤다. 바다사자인지 코끼리물범인지. 가까이 가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 옆을 지나다녔다. 사체를 치우러 올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차에 치인 길고양이는 몇 번 봤어도 그렇게 큰 야생의 죽음은 처음이라, 슬프기보다 낯설었다. 이런 게 자연인가 싶었다.
작가도 집 앞 길가에 죽어 넘어져 있던 말 한 마리 앞에 선다. 냄새 때문에 길을 돌아가면서도, 그는 그 부패에서 위안을 받았다. 자연이 워낙 생명으로 가득 차서 몇몇이 으스러져도 끄떡없다는 것. 자연이 벌이는 죽음에는 죄가 없다는 것. 그는 연민조차 “지지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는 머릿속으로는 이해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초연하지는 못한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이겠지. 저번 주말 제천에 갔을 때도, 로드킬 당한 고양이 사체가 있던 길을 다시 지나야 했는데 굳이 다른 길로 빙 돌아갔다. 소로우도 냄새 때문에 길을 돌아갔다지만 그는 결국 위안을 얻었고, 나는 안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하프문베이에서 받은 것도 위안이었는지 회피였는지 헷갈린다. 안 보고 싶은 마음이 뭔지 더 마주해보자면, 나는 예전에 겪었던 경험들이 가끔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보통은 좋지 않은 기억들인데, 트라우마나 실수, 부끄러운 행동들이 주로 그런 기억들. 아마도 그런 기억들이 머릿속에 한번 남게 되면, 쉽사리 잊어버리지 못하고 가끔 떠오르는데, 이걸 막으려고 그런 상황이나 목격 자체를 피하려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그 사체들이 그렇게 불편했던 건 죽음 자체보다 그게 들이미는 사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 잠깐 왔다 가는 건데, 무엇이 이토록 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걸까. 죽은 짐승은 그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는 건 당연한데. 그 사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길을 돌아가려고 하는 건,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너무 단단히 묶여 있는 게 아닐까.
소로우의 처방은 집착을 덜고 단순하게 사는 것일까. 숲으로 들어간 것도 그래서고. 나는 완전히 숲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읽다가 이런 문장을 적어둔 적이 있다. 내가 사는 곳이 월든 호수가 아니면 어떤가, 내 머릿속이 월든 호수에 살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일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비우는 법에 책 한 권을 통째로 쏟은 소로우도, 정작 그 초연함에는 누구보다 매달린 사람처럼 보인다.
책에서 그 매듭을 비껴간 유일한 사람은 그가 만난 캐나다 나무꾼이었다. 애쓰지 않고도 만족했고, 소로우는 그를 두고 정신적으로는 갓난아기처럼 잠들어 있다고 했다. 생각이 없어 초연한 사람과, 생각으로 초연의 세상을 지으려는 사람. 나는 분명 후자다. 그래서 책을 덮고 자꾸 김현식의 ‘우리네 인생’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거라는 체념 섞인 가사들. 나는 아직 어느 쪽도 못 되고 죽은 고양이 앞에서 길이나 돌아가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내가 왜 돌아가는지는 아니까.